홍지석(미술비평, 단국대학교 초빙교수, 2018)
현종광의 근작 <Utah in Cyan, Magenta, Yellow>(2018)는 두 개의 회화면을 결합한 이면화(Diptych)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은 미국 서부 유타 여행 과정에서 이 화가가 포착한 아름다운 풍경들, 즉 ‘유타사막의 절경’과 ‘서부개척시대의 포장마차’를 회화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작품 앞에 선 관객은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편안하게 감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풍경 감상을 훼방하는 격자선, 곧 그리드(grids)가 그의 눈에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먼저 오른쪽에 있는 포장마차가 있는 풍경을 보자. 격자선들이 없다면 포장마차를 둘러싼 너른 공간은 광활한 사막이나 초원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화가는 가로, 세로의 그리드를 가시화함으로써 화면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광활한 사막을 보려는 관객의 욕망을 좌절시켰다. 그리드로 인해 부각되는 것은 ‘안팎’보다는 오히려 ‘좌우(左右)’, ‘상하(上下)’의 관계들이다. 특히 그리드 안에서 포장마차가 점유한 독특한 위치(우측 상단)로 인해 관객은 주어진 공간을 파악하고 자기 몸을 정위(定位)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포장마차 주변 그림자를 연상시키는 얼룩들이 다소간 친숙한 공간감을 일깨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 얼룩들은 그리드의 수직, 수평 관계들을 부각하는 식으로 기능하면서 그 공간을 낯설게 만드는 경향을 보인다.
‘유타사막의 절경’을 재현한 왼쪽 화면은 어떤가? 확실히 관객은 오른쪽 화면보다는 왼쪽 화면을 볼 때 좀 더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여기서 화가는 풍경화의 고전적 문법을 좀 더 충실히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은 여기서도 곧 그리드의 존재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리드가 창출한 작은 사각형들(입자들)에 상응하는 ‘색점’들이 존재한다. 마치 과거 신인상파 화가들처럼 현종광은 그리드를 준거틀로 삼아 색점들을 찍어나가는 식으로 사막 풍경을 재현했다. 그것은 그리드의 모듈과 반복구조를 통해 색채의 장(color field)을 집요하게 분석했던 19세기 화가들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로잘린드 크라우스에 따르면 19세기 과학자와 예술가들은 빛 정보를 받아들여 대뇌에 전달하는 인간의 눈(생리학적 스크린)이 투명하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인간의 눈이 마치 필터처럼 지각정보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실재의 색채’와 ‘지각된 색채’는 다르며 특정 색의 지각은 인접한 다른 색의 영향을 받는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이것은 단일 색의 지각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잔상(after-image)의 망막 자극이 색채 지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19세기 화가들이 이러한 생리 광학(physiological optics)을 그리드로 나타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하나의 연속적인 장에서 특정 입자들(particles)의 상호작용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리드를 사용했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면 <Utah in Cyan, Magenta, Yellow>에서 유타사막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 그리드를 준거틀로 색채의 분할 묘법(divisionnisme)을 적용한 현종광의 시도는 보색대비와 잔상효과에 열중했던 19세기 화가들의 태도를 계승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현종광의 풍경화에서 색의 분할 묘사는 인상파, 신인상파 회화에서처럼 보색대비를 통해 잔상효과를 야기하는 식으로 작용하기보다는 기저의 그리드를 노출, 부각시키는 쪽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즉 여기서는 확실히 “색채로 충만한 빛의 공간”보다는 “그리드의 엄격한 모듈과 반복구조”가 좀 더 두드러진다. 이것은 잔상, 또는 반복시(palinopsia)를 문제 삼은 현종광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작품 제목에 ‘잔상’이 등장하는 <Theatrical Landscape>(2018)에서 실제로 우리 눈을 자극하는 것은 색채보다는 차라리 그리드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현종광의 회화는 색채대비와 잔상효과를 위해 그리드를 적용했다기보다는 그리드를 개시(開始)하기 위해 잔상을 끌어들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토록 그리드를 부각시키는데 열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종광의 또 다른 근작 <Empty Landscape>(2018)는 “나무들이 무성한 숲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진정 “나무들로 무성한 숲의 이미지”일까? 이런 물음을 촉발하는 것은 화면 중앙에 큼지막하게 자리한 사각형 공간이다. 이 사각형 공간으로 인해 <Empty Landscape>는 크게 두 부분으로 분할된다. 하나는 사실적으로 묘사한 나무들이 보이는 ‘외부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규칙적인 격자선들이 보이는 ‘내부 공간’이다. 외부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환영(illusion)인데 반해 내부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다시금 그리드이다. 이 작품에서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 또는 환영(3차원)과 그리드(2차원)는 팽팽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리얼리티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에는 상이한 두 가지 리얼리티가 공존한다. 하나는 외부공간의 나무 묘사에서 부각된 환영적(구상적) 리얼리티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 공간의 그리드가 나타내는 물질적(추상적) 리얼리티이다. 그것은 구상과 추상이 기묘하게 뒤얽힌 상태에 있다.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은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을 편들기 마련이다. 구상 이미지의 리얼리티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외부공간에 시선을 두면서 내부공간을 불편해 할 것이고 그리드가 창출하는 추상적, 물질적 리얼리티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내부 공간에 시선을 두면서 외부공간을 불편해할 것이다.
그런데 <Empty Landscape>를 위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양자택일의 조건에서 벗어나 양자의 상호작용을 말할 수 있다. 화면 중앙에 존재하는 사각형 공간을 일종의 ‘창문’으로 바라보는 접근방식을 취할 수 있다. 내부의 사각형 공간을 반(半)투명한 모눈종이나 판유리로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실제로 이 화가는 그리드 격자 위에 얼룩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그렸는데 그것은 창문 너머 아른거리는 나무들의 실루엣처럼 보인다(그러면 그리드의 격자선들은 구상 이미지, 곧 창문틀처럼 보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접근방식을 택할 경우 또 다른 긴장관계가 창출된다는 점이다. 창문(반투명 모눈종이)을 통해 어렴풋하게 보이는 나무들은 고정된 형태(윤곽선)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얼룩처럼 부유하는 이미지다. 반면에 사각 프레임 외부에서 보이는 나무들은 확고부동한 윤곽선을 갖는다. 부유하는 이미지와 확고부동한 이미지 양자의 대립은 공시적 층위에서 존재의 유동적 양태(삶)와 부동적 양태(죽음)의 대립을 시사한다. 이렇듯 존재의 두 가지 양태–유동과 부동–를 동시에 아우르는 태도는 <Journey>(2018)에서도 드러나는데 여기서 화가는 공동묘지 풍경을 제시한 후 그에 ‘여행(journey)’이라는 제목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우리는 다시금 두 가지 리얼리티의 공존을 말해야 한다. <Journey>에서 두드러진 것은 공동묘지 풍경의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얻은 환영적 리얼리티지만 그 표면 층위에서 이 작품은 물질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리얼리티를 선사한다. 이 그림을 제작할 때 화가는 아크릴물감과 잉크, 젤뿐만 아니라 그가 현장–보나벤처 공동묘지–에서 채집한 흙과 먼지를 재료로 사용했다. 물론 <Journey>의 표면에 재료를 덧붙이는 일은 그리드의 엄격한 반복구조를 따라 진행됐다.
이렇듯 현종광 회화에서 그리드는 서로 다른 운동, 방향, 매체, 그리고 상이한 리얼리티들을 한 화면에 동시에 매개하는 회화적 장치로서 각별한 의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현종광에 따르면 그의 작업은 “격자선을 모체로 생산과 재생산이라는 반복적인 이동 과정을 거쳐 이미지를 재현한”(작업노트, 2018) 것이다. 물론 그 이미지의 배후에서 우리는 늘 그리드와 극적으로 상봉한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그리드는 원심적인(centrifugal) 경향도 갖지만 동시에 구심적인(centripetal) 경향도 갖는다. 먼저 그리드는 모든 방향에서 무한히 연장될 수 있다. 따라서 현재의 양태는 항상 잠정적, 임시적인 것으로 보인다. 현종광의 <Soldiers> 연작들이 무한히 거대한 조직에서 임시로 잘라낸 조각(단편)처럼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리드는 외부 세계와 분리된 자율적이고 유기적인 전체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현종광의 그리드 회화에서 부분들은 항상 전체, 또는 다른 부분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항상 그림 내부에 잡아 가두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After-image>(2018)는 중력에 따라 사람의 상반신을 위에 두는 상하관계(↑)와 그것을 아래에 두어 중력을 무력화하는 역전관계(↓)를 동시에 아우름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회화면 안에 붙들어 맨다. 이 어지러운 화면 앞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면 관객은 그리드의 수직, 수평 좌표들에 의존해야만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현종광의 근작들은 그리드 안에 온갖 것들을 수용하지만 결국 그리드로 귀결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 과정에서 처음에 의미로 충만했던 것들은 본래의 의미를 점차 상실하고 ‘텅 빈 기표’ 같은 것이 되어 결국 그리드를 지시, 확인하는 매체 내지 수단으로 기능하는 모양새다. 현종광 자신의 표현을 빌자면 이것은 “현대사회 속에 과잉된 이미지의 고유권한을 제거하는 작업”(작업노트, 2018)에 해당한다. 이로써 현종광의 근작들은 엔트로피가 극대점에 달한 평형상태를 암시한다. 버트란트 러셀의 발언을 참조하면 현종광의 회화에서 에너지는 “많은 쪽에서 적은 쪽으로 평형이 이루어질 때까지” 이동한다. 그리하여 결국 남는 것은 그리드다. 그런 의미에서 현종광의 근작들은 궁극의 평형상태를 구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궁극의 평형상태에 최대한 가까운 어떤 것으로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거기에는 아직 현종광이 ‘파편화된 잔상’ 또는 ‘반복시의 잔여물들’이라고 불렀던 것들이 잔뜩 남아있기 때문이다. 투명한 것에 접근하려면 결국 불투명한 필터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