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으로부터 영원을 구(救)하다
– 현종광 <잔상 After-image> 展 –
2020.09.01 – 09.13, 세종갤러리
이 재 걸 | 미술비평
“나는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고 끈 달린 구두를 신은 흑인 여자의 이미지처럼
나를 ‘찔렀던’ 이미지들을 마지막 사유에 결집시켰다.
그 이미지들 각각을 통해서 나는 재현된 사물의 비현실성을 확실하게 넘어 죽은 것,
곧 죽게 되는 것을 두 팔로 감싸 안으면서 광경 속으로, 이미지 속으로 미친 듯이 들어갔다.
니체가 1889년 1월 3일 학대받아 죽은 말의 목덜미에 울면서 달려들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연민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 Roland Barthes, La Chambre Claire(1980) 中
화가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
이미지(image)는 그것이 어떤 스타일로 표상되었든지, 그리고 어떤 미적 동기와 어떤 정신적 동요로 현전하였든지, 추상적인 영혼의 세계를 회상(回想)하는 방식으로 세계 제작에 참여한다. 그래서 이미지는 잠재적인 것들로부터 현실화를 끌어내는 하나의 형식이자, 그 형식의 세련된 결정체이기도 하다. 현재의 모든 사건을 가능케 한 ‘기억’은 이미지의 힘을 빌려 현실 안에서 보존된다. 자연이나 도시의 풍경과 같이 ‘보이는 것’으로서의 이미지는 우리의 감각이 살아있도록 자극하고, 예술작품과 같이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이미지는 우리의 지각이 깨어있도록 자극한다. 시각적 형태로 구성된 이미지 혹은 청각적, 촉각적 형태로 구성된 다양한 이미지들은 우리가 세계를 확인하는 통로이면서 동시에 세계 안에서 ‘살아있는 나’를 발견하는 통로가 된다. 현종광의 회화도 이미지의 형이상학적 생태에 주목한다. ‘그린다’라는 작위성 너머에 있는 이미지의 원초적 삶을 탐(貪)하는 것이다.
작가가 이미지를 구축하는 방식은 참으로 독특하다. 그의 회화는 사진 이미지의 세련된 정서를 물씬 풍기는듯하다가, 파괴적인 그리드(Grid/격자무늬) 구조나 채색의 우발성 같은 시각적 효과의 힘으로 곧장 해체로 나아간다. 뭔가 문명적인 것과 원시적인 것이 충돌하는 형국이며, 이미지를 만들려는 힘과 이미지를 파괴하려는 힘이 서로 격렬하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렇다면 작가가 사진 이미지로부터 출발하여 도착하고자 한 곳은 과연 어디인가? 우선 작가는 사진이란 뭔가를 재현하는 그림(icon)도 아니고, 뭔가를 전달하는 문서(symbol)도 아니며, 그저 존재했던 어떤 것의 흔적(index)일 뿐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흔적’이 지금의 ‘나’로 하여금 죽음의 실체를 떠올리게 한다는 사실도 잘 이해하고 있다. 일찍이 바르트(Roland Barthes, 1915-1980)는 사진의 본질을 ‘죽음’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사진 앞에서 나는 주체도 대상도 아니고, 대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을 느끼는 주체다. 나는 죽음의 미소한 버전을 경험하고 있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사진의 대상은 생기 있게 보이지만, 사진에 포착되는 주체는 생기를 잃는 과정, 즉 죽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겪는다고 말한다. 정지된 이미지가 안고 있는 것, 이미지의 고정성이 상기하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다. 잠재의식이나 개인적 경험에 연결돼 순간적으로 ‘나’를 강렬하게 ‘찌르는’ 사진의 푼크툼(Punctum)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도 바로 죽음이다. 우리가 서랍 속에서 우연히 옛 사진을 보게 될 때, 그것이 아무리 행복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슬프고 아련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 응결된 과거로부터 죽음에 더 가까워진 현재의 ‘나’를 만나게 된다.
인간의 선택에 의한 것이지만 기계적으로 표상될 수밖에 없는 ‘기록으로서의 사진’에는 인간적 표상이 담아낼 수 있는 대상의 내재성이나 초월성이 크게 결여될 수밖에 없다. 현종광의 회화적 발상은 여기서 시작한다. 작가는 ‘이미지-기억’의 고정성을 해체하는 방식으로 시간의 폭력을 극복하려 한다. 그렇다고 그가 단지 사진과 회화의 미묘한 관계성을 탐색하려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시간의 응결’이 불러온 죽음의 뉘앙스를 생명의 리듬감으로 해체하려 하며, 모든 것들의 죽음, 모든 죽음의 표현들, 모든 죽음의 착시들을 영원의 긍정성 안에 포섭하려 한다. 말하자면 그의 회화는 죽음의 냉소적인 표정으로부터 로망티시즘(Romanticisme)을 구출해 내는 행위이며, 정지된 이미지로부터 미세 지각을 해방하는 행위인 것이다.
니체가 학대받아 죽은 말의 목덜미에 울면서 달려들었듯이, 그가 이미지의 세계로 미친 듯이 뛰어드는 이유는 생명에 대한 무한한 연민으로부터 생성되었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기하학적 미분의 아름다움도, 회화적 변용의 즐거움도 이 처연한 인간적 동기로부터 나온 성취에 앞설 순 없다. 그가 이미지를 부수고, 조각내고, 이미지를 진동과 변주의 카오스로 몰아가며 얻고자 한 것은 영혼을 지닌 우리 모두의 영원한 지속(持續)이라는 지극히 ‘원초적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화가가 영원(永遠)을 대하는 태도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기억이란 동일성의 지속이 아닌 차이(difference)의 지속임을 강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기억은 현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어떤 실체의 행위이며, 물질들의 사건적인 흐름 과정이다. 현종광의 회화가 ‘이미지-기억’을 ‘이미지-차이 생성’으로 환원하고, 차이의 반복과 지속을 통해 세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상기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전시의 주제이기도 한 ‘잔상’(殘像)의 사전적 의미도 “시각에 있어서 자극이 없어진 뒤에도 감각 경험이 연장되거나 재생하여 생기는 상(像)”이 아니던가. 작가는 그리드로 촘촘히 나누어진 이미지로부터, 그리고 그 미세한 부분들의 총체성으로부터 이미지의 삶을 ‘차이 생성’의 본보기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사진들, 예컨대 군인들, 집과 복도, 의자와 탁자, 거대한 배와 비행기, 황량한 도로와 자동차 사진들은 과거에 속하는 현실의 발산물들로서 그 자체로 충만하고 가득 차 있다. 여지도 없고 아무것도 덧붙여질 수 없다. 이때 현종광의 그리드는 이 ‘정지된 충만함’을 깨뜨리는 무기가 된다. 작가의 그리드는 사후(事後, 死後)로서의 이미지가 강요하는 침묵을 거부하는 수단이 되며, 대상과 관찰자인 ‘나’ 사이에 새로운 심리적·정서적 공간을 창출하는 매개가 된다. 그래서 작가의 그리드는 장식적인 것이나 형식적인 것을 위한 게 아니다. 이미지에 덧댄 실제의 과잉도, 실제의 변형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억의 기원과 정의(定義)를 따져 묻는 미학적 방법론이며, 이미지의 추상적 삶을 복원하려는 고도의 ‘시적 기술’(詩的記述)이다. 그가 자주 자신의 회화를 ‘시적 회화’라고 말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미지-기억’ 너머에 있는 불확실성의 리얼리티를 감성적 실체로 용인하겠다는 뜻이다.
한편, 현종광 회화의 이미지 모체인 그리드는 반복과 충돌의 사건을 일으키며 익숙한 이미지를 ‘파편화된 잔상’으로 전락시킨다. 이때 부분으로서의 그리드들과 전체로서의 이미지는 상호 분리불가능해지면서 현종광의 이미지는 형태의 삶을 떠나게 된다. 남는 것은 그저 ‘힘의 상태’일 뿐이다. “힘은 현존이지 작용이 아니다”라는 들뢰즈의 말처럼 작가가 추구하는 ‘그리드-생성’은 힘의 얽힘과 분산의 상태로 존재의 속성이 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를 보자. 이 군인들의 획일적인(uniform) 외양과 배치,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억 속에서 우리가 건져 낼 수 있는 정보는 ‘힘’들의 미묘한 상관관계이며, 차이를 통한 의미의 지연, 그리고 ‘있었음’에서 ‘있음’으로의 존재론적 태세 전환이다. 우리가 현종광의 회화에 그려진 대상(object)의 특수한 가치나 본질적 정의보다 대상성(objectivity)에 주목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에게 구상의 형태로 등장하는 개별 대상들, 예를 들어 집이나 자동차 혹은 콜라병이나 골짜기 풍경들까지도 이미지의 추상적 감각, 나아가 이미지의 지속적 감각을 건져내기 위한 미끼일 뿐이다. 이쯤에서 작가의 말을 곱씹어보자.
“마치 그리드는 원본이 소멸한 부재 속의 잔상 이미지를 고정하고 담을 수 있는 성유물함과 같다.
나의 회화의 모체(matrix)가 되는 그리드는 부재 속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잔상들을 지연시키는 물리적 또는 정신적 좌표이다.” (작가 노트 中, 2018)
그래서 현종광에게 부재(不在)로서의 이미지는 곧 잠재성의 요람이다. 그는 ‘의미화’(意味化)의 빈곤한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차원의 생성을 촉진한다. 망각은 그래서 감사할 따름이다. 규정적인 것들에 대한 망각은 사유의 풍요로움을 잉태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성이 아닐 수 없다.
잔상(After-image)으로서의 우리
가벼운 존재의식으로 가공된 작품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기괴한 날카로움은 허약한 우리의 영혼에 불필요한 생채기를 남긴다. 이러한 작품이 전달하는 값싼 확신들이 충족시킬 수 있을 만큼 우리 존재의 양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더 많은 이해의 가능성 안에서 존재의 안식을 찾고, 존재의 나아갈 바를 구상한다. 현종광의 예술이 반가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저 잘 그려졌거나,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측면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우리의 영혼에 간결하지만 고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드 형태로 메타포된 특이한 세포적 풍경, 그 미시적이고 상보적인 힘들의 충돌 속에서 세계와 존재의 기원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첫째요, 이미지의 삶을 기억으로의 퇴행이 아닌 영원으로의 부활로 기획한다는 것이 그 둘째이다. 그래서 현종광의 회화가 아름다운 진정한 이유는 이제 더 이상 형태의 화려함이나 붓질의 장인 정신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형식의 세계가 작품의 정신에 얹어 놓은 덤일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관점에서 그의 ‘그리드-회화’는 어떨까?
첫눈에 그의 그리드는 시작도, 끝도 없이 움직이는 하나의 단순 실체로서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가 말하는 모나드(Monad)를 닮았다. 더 이상 분할되지 않는 존재의 최소 단위로서의 모나드는 스스로 움직이는 힘이고 생명 그 자체이다. 모나드의 세계에서는 그래서 인간, 신, 자연을 구분할 수 없다. 다만 각각의 모나드들은 명료성의 정도, 힘의 응집과 분산에 따라 차이를 만들어 낸다. ‘정신의 원자’ 혹은 ‘형이상학적 DNA’에 가까운 모나드 개념과 현종광의 그리드 개념은 서로 닮아있다. “세계를 가루로 분쇄하고 또한 이 먼지들에 정신성을 부여”(Gilles Deleuze)한다는 측면에서 그러하고, “불완(不完)의 완벽”으로서의 세계를 지각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어쩌면 ‘인간의 의미’를 설파하는 모든 언어적, 윤리적, 사회적 규정들 너머엔, 나아가 모든 형식과 상징과 이미지의 역사 이전엔, 존재의 진정한 주인으로서의 우리가 있을 것이다. 생김새와 태도로 정의되는 존재가 아닌 ‘힘의 상태’, 모나드의 주름진 잠재성의 상태, 그리드의 얽힘과 분화의 상태로 정의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매일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을 지나친다. 누군지 기억나진 않지만, 그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나’도 누군가에겐 망각된 실존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불투명한 형태로 성장함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체험된 영혼이며,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모두 신체의 버젓한 소유자이며, 놀라운 호기심을 지닌 정신이다. 때로는 적당히 도덕적이며, 때로는 간교하기도 하며, 때로는 변화무쌍한 자신을 즐기기도 한다. 우리는 곧 죽음을 맞이할 가여운 존재이지만, 그 죽음의 우주적 가치를 캐묻기도 하는 놀라운 존재들이다. 어찌 우리가 세계의 잔상이 아닐 수 있겠는가. 지구의 곡면을 평평함으로 착각할 만큼 초라한 존재일지언정, 잔상의 형태로 영원한 잠재성의 세계로 돌진하는 우리는 적어도 ‘무효’는 아닐 것이다.